고요함이, 정적이,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살기가 흐르는 검은 눈동자와 조소하는 노란 눈동자의 시선이 기괴하게 이어졌다. “쓰지 않았던 게 아니라 쓰지 못했던 거였지?” 스가와라가 기소하고 있는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능력을 쓰지 않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히나타 때문이 아닌 무언가가. 츠키시마는 그 무언가를 눈치 챈 것이 분...
“너, 정말로 기분 나쁘단 말이야.” 츠키시마가 자세를 잡으며 조소했다. 처음부터 봐주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가 기분이 나빠졌는지 들어 올린 손가락을 세웠다. 그 모습을 본 카게야마의 손끝도 날카롭게 섰다. 그가 히나타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가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어지고 곧 카게야마가 달려 나갔다. “어서 오라고.” 두 사람의 거리가 ...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던 다이치가 손을 내리자 흙덩어리가 거대하게 움직였고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이는 흙덩어리들 위로 거대한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바람이 불고 흙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자 벽을 간신히 잡고 서 있던 타나카가 입술을 쓸어 넘기며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벽 끝에 히나타를 내려놓고는 안개처럼 올라온 먼지 사이로 뛰어들었...
휘슬이 울리기 전은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때이자 심장박동이, 긴장감이 가장 고조할 때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발이 같은 곳을 딛고 서로 다른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텅 비어있는 어둡고 광활한 필드. 빛이라고는 수 십 미터 떨어져 있는 형광등 뿐. 멀리서 다가오는 다이치의 발소리가 넓게 퍼져 울렸다. 그가 책상위에 놓인 크립텍스를 꺼내 들어 ...
걸어가는 내내 티격태격 하는 그들의 분위기에서, 목소리에서 이전과 다름이 느껴졌다. 그들을 감싸는 복도의 하얀 빛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루의 가장 깊은 밤은 해가 터 오르기 직전의 밤이다. 아직 빛이 어둠을 다 물들이지 못하고 밤의 고요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불안한 이 빛이 하루에서 가장 밝은 빛이다. 아무런 소리도...
강하게 쏟아졌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물웅덩이에 튀던 비가 잠잠해지자 카게야마가 건물 밖을 나섰다. 바람이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갔다. 앞으로 나아간 그가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늘 안에 있는 히나타와 시선이 이어졌다. “해봐. 하고 싶은 대로.” “그게 무슨…….” “다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 히나타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손 안에 느껴지던 온기. 한가득 차오르던 빛줄기. 그 옆에 있었던 커다란 손. 눈이 부시도록 가득했던 하얀 빛깔. 그 때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손가락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감각들이 돌아왔다. “…….” 눈이 떠졌고 하얀 천장이 보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방안을 가득 채우는 햇빛. 그가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얼...
스가와라와 타나카가 발걸음을 움직이자 뒤에 있던 두 사람도 발걸음을 옮겨 강당을 빠져나갔다. 꽤나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 굳게 잠긴 철문이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마치 철벽같은 그 묵직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위 강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안에는 9개의 부서진 사각형의 기둥 단면들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탁한 ...
째깍째깍, 초침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낮은 기계음이 나지막이 들려온다. 살짝 빠져나온 작은 손이 더듬거리며 이리저리 어설프게 움직였다. 잡힌 시계는 하얀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멈춰 섰던 움직임이 이내 꿈틀거리며 시트를 어지럽혔다. 뿌옇게 뜬 시야의 틈으로 보이는 건 막 터 오르기 시작한 이른 새벽의 아침이었다. 그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멀리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장난 치고 있던 타나카도 그의 장난에 웃고 있던 히나타도 들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멈춰 섰다. “다들 와있었네.” 엔노시타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 너머로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노란머리에 큰 키. 검은 색의 안경을 끼고 있는 남자와 그 옆으로 그보다는...
고요한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가득 울리고 있는 건 검은 색 워커와 작고 오래된 운동화였다. 전혀 다른 발자국 소리가 서로 스며들어 나지막이 번지 듯 들려왔다. 있었던 곳에서 빠져나와 어디론 가로 이어진 복도는 조금 생경했다. 복도 끝에 굳게 닫혀있는 하얀색 철문이 보였다.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문이 스가와라의 손에 쉽게 열려졌다. ...
경계의 저편엔 그 어떠한 생명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음을. 피폐하고 지독해 말라버린 땅과 비틀어진 나무. 모래가 가득 날리고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는 곳. 버려진 땅.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보란 듯이 나의 생각을 허물었다. 눈앞에 들어온 건 분명히 황폐화된 땅이었다. 살아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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